[칼럼]남북평화협력 시대와 민주시민교육 / 강민정 징검다리 상임이사

역사적인 4.27 판문점 선언이후 남과 북을 옭죄어 왔던 분단의 고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희망이 손에 잡히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분단은 남과 북 사이에 물리적 장벽만을 만든 것이 아니다. 경제나 국민복지에 쓰일 수 있는 연간 수십조에 달하는 돈이 해마다 국방비로 쓰이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창 일하고 공부할 나이의 모든 젊은 남자들은 생의 2~3년을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마음 졸이는 부모들의 고통 역시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져 왔다. 다른 나라의 승인을 받지 않으면 우리 땅에서 철도를 연결하는 일도 맘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란다.

 

물리적인 제약만이 아니다. 우리는 휴전을 했을 뿐 늘 전시상황이다.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어떤 비난과 공격, 자격과 권리박탈도 용인된다. 국보법이 엄존하면서 모든 국민은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셀프 사상검증에도 익숙해 있다. 우리의 사고와 상상력은 어느 지점까지만 허용되고 모두 같은 지점에서 멈춘다. 반공이라는 이유로 30년간의 군사독재가 허용되어 왔고 그것이 남긴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획일화의 잔재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너무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흑백논리의 이분법에 익숙해져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취향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다양성보다는 비슷한 것들이 편하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 출발이니 어찌 보면 분단은 민주주의의 기본전제가 취약한 사회를 만들어낸 커다란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촛불 이후 많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을 종북이라고까지 매도하는 일이 통용되던 게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분단은 우리 사회에 서로를 악마화하지 않으면 적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등치시키는 문화가 자리 잡도록 하였다. 월북했다는 이유로 시를 교과서에 싣는 것이 금지되고, 반쪽짜리 독립운동사를 가르쳐야 했다. 반공이면 친일도 용서되는 것이라고 배워야 했다. 세상과 삶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이 교육이지만 분단이 만들어 낸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분단을 가르치지 않는 분단국가’가 우리교육의 또 다른 모습이다.

 

분단은 남한에게도 북한에게도 정상적인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으로 작용해 왔다. 다행스럽게도 서로를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럽게 해 왔던 분단장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가 한 세기 전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의 마지막 상징인 한반도를 주목하고 있다. 교류와 화합, 평화의 물꼬가 거대한 강줄기가 되어 흐르기를 소망하며 지지를 보내고 있다. 분단장벽을 허무는 교류와 화합, 평화의 물꼬를 트는 것은 정치권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은 국민들의 힘에 의해 가능한 일이다.

 

6.15 공동선언과 10.4 남북공동선언이 이어졌던 시기에 금강산 관광이 효도관광으로 각광을 받고 김정일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가 확산되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화해와 평화 시대가 열릴 것 같았지만 다시 냉랭한 반목과 대립, 불신이 되살아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서울대생의 59.8%가 통일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였다고 한다. 2007년 이후 가장 높은 긍정비율이라고 한다.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의식이 지속되고 확대되어 70년 분단고착화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의식과 문화의 토대를 만드는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치가 길을 연다면 그 길을 다지는 것은 교육의 몫이다. 정치가 집을 짓는다면 그 집을 사람 사는 곳으로 꾸미고 채우는 것 역시 교육의 몫이다.

 

오랜 세월 굳어진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깨는 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 함께 새로운 평화와 통일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일을 위한 준비가 교육 분야에서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의식과 문화의 변화는 공동선언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20년 전에 이미 베를린 장벽을 허문 독일도 여전히 통일은 현재진행형이라 한다. 통일 이전에 비교적 오랫동안 교류하고 민주시민교육을 강조해왔던 독일조차 분단이 남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니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전쟁을 치러야 했던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그보다 더 크고 어려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분단은 민주주의 발전을 제약하는 원인이자 민주주의 발전 수준에 의해 제약당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전제이자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체득해야 할 중요한 태도다. 분단은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고 적대시하도록 강제해왔다. 당연히 민주주의 발전과 민주시민교육 실천이 한계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역의 관계도 동시에 존재한다. 아무리 정치적 차원에서 화해평화를 위한 제도적 여건을 만든다 해도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 정도와 국민들의 민주시민성 수준에 따라 분단장벽 해소의 속도와 방식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차이를 다양성과 풍부함의 자산으로 보지 않고 차별의 근거로 삼는 한 70년 간 형성된 남북 간 차이를 극복하기 쉽지 않다. 또한 갑질이 허용되는 사회라면 남북 사이에 갑질을 확대재생산할 가능성이 현저히 높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남과 북은 분단으로 인한 제약과 왜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왔다. 분단은 남북 모두에게 분단을 겪지 않은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치사회구조의 변형을 겪게 만들었다. 남과 북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는 경험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이는 우리 현대사가 만들어 낸 역사적 산물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시민의 삶을 위해서도 남북 모두에 평화로운 민주주의를 꽃피게 하기 위해서도 남북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분단이 만들어내는 제약들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히 민주시민교육에서 분단이 만들어낸 이분법적 사고, 사고와 상상력의 부자유 문제에 대해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분단으로 인해 왜곡된 우리 자신과 분단으로 인해 가려지고 편견의 대상이 되어왔던 상대방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남과 북에 분단으로 인한 질곡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작동되고 있을지라도 희망은 있다. 촛불혁명을 이룬 남한과 냉혹한 자본의 경쟁논리에 덜 오염된 북한이라는 소중한 자산과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남북이 가진 긍정성에 주목하고 이를 발전시킨다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속설을 보란 듯이 우스개 소리로 만들 수 있다.

 

남북평화협력 시대 민주시민교육은 문맹과 컴맹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처럼 북맹이 우리에게 또 다른 불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분단이 만들어낸 문제를 직시하되 우리가 가진 긍정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남과 북 모두 평화로운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분단국가 민주시민교육에 요구되는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