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위원회 정기상영 ‘아침바다 갈매기는’+감독과의 대화
<아침바다 갈매기는> 리뷰
정숙연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제목이자 바다라는 공간을 상기시키는 제목이었다. 박이웅 감독은 성석제의 단편 <재미나는 인생>에 나오는 구절인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짓는다’와 동요 ‘바다’의 한 구절이라 했다. 그러면서 이 노래가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데 정서적으로 슬픈 감정이 든다고 말하며 관객은 이중적 감정이 가진 갭을 메워보려고 생각하다가 영화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예술일 수 있는 이유다.
감독과 배우는 약간의 상극성이 있다. 1번 더 찍으려는 자와 1번 떨 찍히려는 자의 보이지 않는 긴장이 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에는 양희경, 윤주상이라는 노장의 두 배우가 나온다. 주로 드라마에서 연기한 배우가 영화에서 이렇게 임팩트가 있을 수가 있을지 감독의 역량을 헤아려 보려 했다. 박감독은 연기는 모두 배우의 몫이라고 돌렸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대를 막연하게 그리고 있었고 그것을 채워준 것이 배우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을 수는 없잖아요” 이 대사는 포스터에 박제되었다.
죽을 수 없기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런 선택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형락은 남면으로 다시 돌아오고, 영란은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판례는 경로당으로 그리고 영국은 바다로 용수는 살기 위해 죽음이라는 위장을 쓰고 떠났다. 살고자 하는 용수의 욕망이 죽음이라는 자발적인 단어를 건져 올렸고 그것이 영국이라는 타자의 도움으로 그 영국의 이타심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
‘그들은 왜 떠나는가’ 그들의 이동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
“갔나?”
“갔지, 그럼!”
“됐네, 그럼!”
그렇게 용수도 떠나고 영란도 떠나고 젊은이들은 떠나갔다.
6개월 동안 고민한 이 마지막 대사를 감독은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말하는 신비한 체험(신적 체험)으로 30분 만에 완성했다고 말했다.
“그럼”이라는 당위를 나타내는 이 대사가 영화의 완성을 뜻한다고 보였다. 사건의 종결이자 어부 용수의 죽음이자 또 다른 베트남 용수의 부활이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풍어를 위한 바다로의 질주는 배가 일으키는 거품으로 희망이 차오른다. 배 아래의 심연에는 절대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을 꽁꽁 묻었다.
영화는 바닷가의 한 마을에 대한민국의 여러 문제점을 폭탄처럼 투하하고 있다. 국가적 고령화 문제, 출생률 저하 문제, 다양성을 잃어버린 사회의 배타적 공동체,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무시, 대상화까지 다양한 문제를 넣었다. 그것들로 빽빽하게 채우고 묵직하게 밀고 나간다. 하나씩 떼어놓고 여러 편을 제작할 수 있는 주제들이라 ‘꼭 필요한 장면일까’ ‘혁수는 착한 혁수로 둘 수는 없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낭만성에 젖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며 배가 가라앉고 있음을 소리치는 영화이다. 청소년 자살률 1위, 노인 빈곤율 1위라는 수치들을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한다. 앞에 선 개미의 페르몬 냄새를 쫓아가는 개미와 네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하다 골목길에 차들이 빽빽하고 밀렸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오버랩 된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무사유’의 세상이 나르시시즘을 불러오는 스마트폰 세상이다.
이 영화는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불릴 수 없는 영국이라는 특별한 성격의 인물의 내부에 들어있는 온기의 가치를 말하려고 한다. 영국의 도움이 용수를 살렸듯이 누군가의 사소한 도움이 힘든 처지의 누군가를 위해 작동해야 한다는 것, 우리에게 그런 인간애가 존재하고 있음과 그것들을 꺼내고 작동시키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를 직시하고 왜 떠나는가를 사유하고 가라앉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관점으로 영화를 보자면 우선 베트남 결혼 이주민들의 대사에서 베트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하고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고 말한다. 이는 주입금지, 강압 금지에 해당한다. 다음으로는 ‘판례를 두고 영란이 떠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혁수가 수색을 계속한 것은 보상금을 받기 위한 것인가’ ‘향락과 부녀자들의 다툼에서 누구를 지지하는가’ ‘영국이 용수를 도운 것은 정당한가’ ‘용수의 계획은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 이후의 용수의 모습은 어떠할까’ 등의 주제로 논쟁적 토론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이익의 관점으로 판단해야 한다면 이 영화는 물질적인 돈보다는 사람이 주는 인간애, 사람다움은 무엇이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어떤 것인지 보여주며 이것들이 사라진 세계에 미래가 없음을 주지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