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재판은 안 되는데, 자기 입법은 왜 되는가 — 셀프 입법 특권을 말하다 | 곽노현
징검다리 시민정치학교 6강.
국회의원의 셀프입법특권과 파생의원특권, 무엇이며 왜 문제인가?
(인공지능 요약)
셀프 입법 특권이라는 개념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대통령과 사법부를 다뤘다. 오늘부터는 의회다. 오늘 주제는 셀프 입법 특권과 그 파생 특권이다. 셀프 입법 특권이라는 용어는 내가 만든 말이다. 다른 데서 들어보신 적이 없을 것이다. 이 개념을 벼려낼 때 나는 이것이 선거 민주주의의 본질적 한계를 짚어내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중요한 개념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누구든지 자기 재판을 할 수 있는가. 안 된다. 재판은 이해관계 없는 제3자가 해야 한다. 이것이 자기 재판 금지의 원칙이다. 마찬가지로 대리인이 자기 이익을 대리할 수 있는가. 안 된다. 대리인은 주인을 대리해야지 자기 이익을 대리하면 안 된다. 이것이 자기 대리 금지의 원칙이다. 거래 양쪽을 한 사람이 동시에 대리하는 쌍방 대리도 금지된다.
그런데 국회의원을 보라. 국회의원은 국민이 뽑은 대리인이다. 주인은 주권자 국민이다. 그렇다면 대리인인 국회의원의 권리와 의무는 누가 정해야 하는가. 당연히 국회의원 자신이 정하면 안 된다. 그런데 권리 의무를 정하는 것이 법이고, 그 입법권을 국회의원이 갖고 있다. 그러니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의 권리 의무를 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지금 우리 헌법의 실제 모습이다. 국회의 입법권에는 위헌 법률 금지와 개인을 콕 집어 대상으로 하는 사법률 금지 외에는 사실상 아무 제한이 없다.
이해충돌의 오랜 법리 — 제척, 기피, 회피
법의 세계에는 이해충돌을 다루는 오랜 법리가 있다.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은 결정 과정에서 배제된다. 이것을 제척이라 한다. 재판관 스스로 이해관계를 인식하고 물러나면 회피다. 상대방이 재판관의 이해관계를 알고 그를 물러나게 하면 기피다. 재판관이 자기 고등학교 동창을 재판하게 됐을 때, 공정할 자신이 없다면 회피해야 맞다. 이런 제도가 재판에는 촘촘하게 있다.
그런데 국회는 어떤가. 국회의원이 국회의원 자신의 권리 의무를, 국회가 국회의 권리 의무를, 소속 정당이 소속 정당의 권리 의무를 스스로 정하고 있다. 국회의원이 법을 만들 때 국민만 생각할까, 아니면 자신의 재선 가능성과 소속 정당의 집권 가능성을 함께 생각할까. 후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선거 민주주의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한계다.
헌법에서부터 시작되는 국회 중심성
헌법은 국회의 권리 의무를 정할 뿐 아니라, 국회와 주권자의 관계, 국회와 지방자치단체의 관계도 정한다. 그런데 이 헌법을 다루는 것도 결국 국회다. 국회가 주권자와의 관계를 정할 때 국회 편을 들지, 주권자 편을 들지 생각해보라. 팔은 안으로 굽는다. 지방자치단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방의회의 입법권과 재정권을 두텁게 해주면 국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그러니 국회는 지방자치를 약하게 만들 유인이 있다.
반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관계에서는 권력 분립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진다. 서로 대등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권자와 지방자치단체는 국회보다 아래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국회가 이 둘의 권한을 형식적으로만 만들어 놓고 스스로는 실질적 권한을 계속 키워온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3
정치관계법 전체가 셀프 입법이다
선거법, 정당법, 국회법, 지방자치법, 정치자금법, 국민투표법, 주민투표법. 이런 것들을 정치관계법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법을 국회가 입법한다. 이것이 자기 대리 입법이다. 이 법들이 누구의 이익으로 귀결되게끔 정해지는가. 첫째는 국회의 이익, 둘째는 국회의원 개인의 이익, 셋째는 소속 정당, 즉 거대 양당의 이익이다. 거대 양당의 이익을 우선하는 순간 군소 정당과 제3정당이 피해를 본다.
선거법을 만들 때 국회의원은 본인의 재선 가능성이 높은 제도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정치자금법을 보면 원외 지구당 위원장은 후원금을 걷을 수 없고 현역 의원만 걷을 수 있다. 어제까지 원외에서 손가락을 빨던 사람도 현역이 되는 순간 이 특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확 일치해버리는 것이다.
국회의원이라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국민 소환 제도를 내 손으로 만들고 싶을까. 시민이 일정 서명을 모아 법안을 직접 발의할 수 있는 국민 발안권을 내가 지지할까.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선거구제를 비례대표제로 바꾸는 일도 마찬가지다. 소선거구제는 거대 양당에게 유리하다. 전국 지지율이 15~20%가 나와도 소선거구제에서는 단 한 석도 못 얻을 수 있다. 반면 완전 비례대표제라면 20% 지지율로 60석을 가져갈 수 있다. 이 차이가 셀프 입법 특권이 만들어내는 결과다.
개혁이란 특권을 때리는 것이다
모든 개혁은 특권화된 기득권을 때리는 것이다. 기득권 자체는 현행 법질서가 부여하는 정상적인 권리다. 그런데 이 기득권이 너무 일방적으로 쏠려서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분쇄나 감축이 불가능해질 때, 우리는 그것을 특권이라 부른다. 민주주의에는 원래 자기 영속적인 것이 없다. 인민의 의지와 열망에 따라 언제든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특권이라는 말은 곧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저기 특권이 깔려 있으면 혁명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기 전에 정치 개혁, 경제 개혁, 언론 개혁, 검찰 개혁, 사법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정치 분야에서 특권 넘버 원은 거대 양당의 특권이다. 이것은 선거 제도가 만들어낸다.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가 만나는 순간 거대 양당제가 필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선택지가 둘로 좁혀지고, 선거 때마다 중도 수렴이 일어나니 실질 선택지는 1.5개에 불과하다. 정책적으로 양당의 차이가 별로 없으니 사람들은 인물 간 권력 투쟁에만 흥미를 갖게 된다. 당 대표 경선이 경마 중계처럼 소비되는 이유다.
정청래의 실험 — 당원 주권이 특권을 넘어선 순간
그런데 최근 흥미로운 사례가 있었다. 민주당 안에서 당원 주권이 오랫동안 힘을 못 썼던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대의원 제도다. 예전에는 대의원 한 표가 일반 당원 150표에 맞먹었다. 지금은 30대 1까지 줄었지만 여전히 격차가 크다. 대의원은 현역 국회의원이자 지구당 위원장인 사람이 사실상 뽑는 구조라, 대의원 비중이 클수록 현역 의원에게 유리하다. 그런데 정청래가 이 대의원 표를 1인 1표로 바꾸는 것을 밀어붙였다. 그 덕에 그가 당 대표가 됐다.
둘째는 공천권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지방의원 공천은 원칙적으로 경선으로 이뤄졌다. 이것은 현역 국회의원과 현역 지구당 위원장이 갖고 있던 공천 권력을 회수한 것이다. 특히 국회의원을 내기 어려운 영남 지역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에게 공천권은 거의 유일한 권력이었는데, 그것이 사라졌다. 정청래 같은 인물이 중간 지도층의 권력을 박살 낸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싸움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여건 — 지금이 기회다
이재명 대통령은 정청래보다 훨씬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지금 70%가 넘는 권리당원이 그를 지지하고 있다. 국회의원들도 함부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수 없다. 경선을 하더라도 권리당원이 투표하고, 그 권리당원은 이재명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거리가 있는 후보는 경선에서 표를 받기 어렵다.
이재명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나는 더 이상 국민에게 표를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정치 분야에서 가장 정의로운 대통령, 특권을 없앤 위대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국회의원 절대다수가 이미 그의 지지자들이다. 여건은 갖춰져 있다.
다만 지금은 지방선거 직후라 원래는 개헌과 정치 개혁 논의가 나올 시점인데, 그 얘기가 쏙 들어가 있다. 왜냐하면 삼성과 SK가 향후 10년간 6천조 이상을 투자하는 초대형 프로젝트가 발표됐고, 이것이 대체 불가 대한민국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에 온 나라가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이 투자가 현실화되도록 정부가 총력을 기울이는 사이, 정치권 전체가 다른 목소리를 낼 여유가 없어졌다. 양당 모두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고, 행정부는 메가 프로젝트에 매진해야 하고, 국민들도 새로운 정치 아젠다에 집중할 겨를이 없다.
그래도 목소리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정치 개혁과 개헌을 계속 얘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객관적으로 필요한 말을 계속해야 한다. 그 말이 곧바로 실현되지는 않을지라도, 그때그때의 편익에 따라 모두가 한 방향으로만 몰려가고 다른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원전 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어느 목사님의 글도 그런 역할을 한다. 정부에 비판적인 급진적 목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살아 있는 사회다.
국민 발안 같은 직접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면 극우 세력이 악용할 소지는 없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물론 있다. 모든 제도에는 명과 암이 공존한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빅테크 기업들이 노동 조건 개선 법안에 반대하려고 국민 발안 제도를 역이용한 사례가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정치자금 기부를 표현의 자유로 인정한 판례 때문에 미국 정치는 공식적으로 금권에 흔들리게 됐다. 이것이 미국이 망조로 접어든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이런 우려 때문에 좋은 제도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제도는 빈 그릇과 같다. 그 안에 바보 같은 민의도, 스마트한 민의도, 가혹한 민의도, 따뜻한 민의도 담길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양식 있는 과반수가 그 그릇을 채우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 우려가 현실화되지 않도록 주변 제도와 문화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비관은 안 된다 — 100만 서명이면 바뀐다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이냐. 이것은 정당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이것이 비관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의 모든 조건이 우리가 힘을 모으면 오히려 빠르게 바뀔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셀프 입법 특권을 없애고 국민 발안과 시민의회 입법을 도입해달라는 서명 운동에 100만 명이 호응해서 제출한다면, 이재명 대통령이 이를 외면하기 어렵다.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서 셀프 입법 자기 대리 입법의 문제를 정면으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몇 달만 지나면 개헌 논의의 문이 열릴 수밖에 없다. 최소 합의 수준의 개헌으로 흐르기 쉽겠지만, 그 가능성의 폭을 우리가 조금씩 넓혀가야 한다. 깨어난 시민이 많아질수록, 대리인이 스스로 자기 권한을 정하는 셀프 입법 특권이라는 근본 모순은 결국 무너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