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회란 무엇인가, 왜 지금 시민의회인가 | 곽노현
미니국민의 집단지성으로 난제를 푸는 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
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
국민대표성과 숙의성, 투명성을 동시에 갖추도록 설계된 시민의회는 깨어 있는 국민의사를 확인해 민주주의를 관철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수단이다. 이미 고대 아테네 시절에 1년 임기의 500인 추첨시민의회가 공식 대의기관으로 운영됐다는 점에서, 추첨시민의회라는 형식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 이후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추첨에 의한 대의기관은 종적을 감췄다가 21세기에 이르러서야 숙의 소우주로 재설계되어 다시 등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시민의회는 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관찰했다. 각 개인이 따로따로 있으면 전문가보다 판단이 못하겠지만, 함께 모인 개인들의 집단은 전문가보다 낫거나 최소한 전문가만큼은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대표성과 숙의성을 보장받는 추첨시민의회는 바로 이 믿음 위에서 고안된 21세기 민주주의의 새로운 표준이다. 선거의회가 20세기 민주주의의 표준이 되었듯, 시민의회는 21세기 민주주의의 표준이 될 것이다.
선거는 왜 귀족적인가, 국민을 닮지 않은 국민대표기관
시민의회의 정당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선거 대의제의 근본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선거 경쟁을 통해 대표자를 선발해야만 민주적 대표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는 현대 민주주의가 국민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방법이지만, 지금도 형사재판의 배심원을 추첨으로 뽑는 데서 보듯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고대 아테네 시민들은 선거로 유능한 대표자를 뽑아 안정적 임기를 주는 방식을 임기 있는 귀족을 뽑는 비민주적 방식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추첨과 윤번에 의한 일시적 대표를 옹호하고 제도화했다. 그래야만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이념이 관철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 곧 모든 시민의 집단적 자기지배로 파악하는 순간, 선거와 정당으로 매개되는 대의민주주의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선거로 대표자를 뽑으면 유권자가 화려한 경력의 능력자를 선호하기 때문에 대표자가 조금도 국민을 닮지 않는다. 어디서나 선거일은 민중에 의한 정부라는 이념이 졸지에 엘리트에 의한 정부라는 현실로 바뀌는 날이다. 루소는 이를 두고, 영국 인민은 선거일 하루만 자유로울 뿐 그날이 지나면 다시 노예가 된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뽑힌 대표자가 뽑은 주권자를 얼마나 닮지 않는지는 우리 국회를 보면 분명하다. 국민은 여성이 절반, 20대에서 40대가 절반, 재산 5억 미만이 절반 남짓인데, 21대 국회의 뽑힌 대표는 여성이 19퍼센트, 20대에서 40대가 17퍼센트, 신고재산 5억 미만이 정확히 20퍼센트였다. 2019년 말 기준 국민 가구 평균 재산이 약 4억 3천만 원인데 21대 국회의원의 평균 재산은 22억 원이었고, 국민 가구 중위재산이 약 2억 8천만 원인데 의원들의 중위재산은 약 12억 원이었다. 사회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이른바 SKY 출신이 무려 34퍼센트에 달했다.
한마디로 국민대표기관이라는 국회는 인구통계학적으로 국민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 평균연령 55세의 부유한 고학력 남성 엘리트 중심으로 짜인 국회가 보통사람에 의한 의회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런 의회가 과연 보통사람을 위한 기관이 될 수 있겠는가. 어느 나라에서나 시민이 의회와 의원을 극도로 불신하는 현실은 대의제의 표준 장치만으로는 엘리트 의회가 국민을 위한 의회로 평가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여기서 20세기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반성이 나온다. 남성 중심, 노장년 중심, 법조인 중심, 부자 중심의 국회를 깨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는 이상 그 엘리트적 성격을 극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국민은 자신을 닮지 않은 선출의회와 함께 자신을 닮은 시민의회를 이중으로 가져야 한다. 선출의회와 추첨의회가 기능적으로 분업하며 견제하고 협력하되, 핵심 원칙은 선출의회가 국민의사 대변에 실패하거나 부적절할 때 시민의회가 나선다는 것이다.
국민의사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여론조사의 한계
모든 정당은 민심과 여론을 신주단지처럼 받들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의사에 따라 문제를 풀려면 먼저 국민의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사란 사안이 생길 때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사안일수록 시민들은 뉴스 보도와 정치권의 설전, 전문가 토론, 지인과의 대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학습하며 서서히, 또한 역동적으로 자기 의견을 형성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그때그때의 국민의사를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여론조사다. 무작위 추출된 1천 명 안팎의 미니국민을 대상으로 삼아도, 랜덤 샘플링 덕분에 그 표본은 조사 항목에 관해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여론조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첫째, 여론조사는 응답자에게 학습이나 토론, 숙고 없이 즉각 답하기를 요구한다. 같은 응답자라도 학습과 토론을 거치면 의견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둘째,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새로운 발상이나 가상의 사고실험은 조사 대상으로 삼기에 부적합하고, 단편적 찬반을 넘어선 종합 의견을 끌어내는 것은 여론조사의 본령이 아니다. 셋째, 여론조사는 돈이 들기 때문에 비용을 대는 의뢰자의 관심과 이해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대통령실과 여야 정당, 언론과 대기업이 가장 빈번한 의뢰자이고, 이들의 관심 밖에 있는 의제는 아무리 중요해도 조사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여론조사는 강자의 무기다. 넷째, 여론조사 결과에는 구속력이 없어, 정치권은 자기에게 유리할 때만 선택적으로 추종하고 불리한 결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한계 탓에 여론조사로 드러나는 것은 대체로 표층적 국민의사다.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학습 기회를 제공해도, 응답자 개개인의 학습 편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여론조사로 드러난 사회적 합의는 응답자들이 균질하게 학습하고 토론할 경우 도달할 합의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딜레마가 생긴다. 정치인과 전문가는 직업적으로 공적 문제를 학습하고 토론하지만, 일반시민은 생업에 바빠 그러기 어렵다. 민주주의가 정치인의 지배도 전문가의 지배도 아닌 일반시민의 지배를 뜻한다면, 우리는 일반시민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일반시민은 공적 사안에 무관심하거나 정보가 부족하거나 무기력한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논란이 끊이지 않는 중대 사안에 대해 깨어 있고 책임 있는 국민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가. 시민의회는 바로 이 핵심 질문에 대한 혁신적 해법이다.
시민의회 해법, 추첨과 숙의의 결합
시민의회 해법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선거 엘리트 의회에 대비되는 추첨시민의회를 만든다. 성별과 연령, 지역, 직업, 소득, 학력, 정치성향까지 최대한 국민을 빼닮은 미니국민 집단을 추첨으로 구성한다. 둘째, 이렇게 만든 시민의회에 상이한 관점과 입장을 가진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을 붙여, 시민의원들이 안건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논거를 충분히 학습하고 동료 시민과 토론하고 숙의하게 한다. 셋째, 집단지성으로 옷 입은 시민의회가 진영논리나 당파성, 특수이익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현실감각과 균형감각을 동원해 정책 권고안을 작성하고 공표한다. 깨어 있는 국민의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시민의회는 여론조사와 같은 방식으로 국민을 쏙 닮은 미니국민을 만들되, 그들에게 학습과 숙의 과정을 제공해 즉각 반응하는 의사가 아니라 집단지성으로 다듬어진 의사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여론조사와 갈라진다. 여론조사가 즉자적 민중의사를 알아보려고 강자가 동원하는 무기라면, 시민의회는 깨어 있는 민중의사를 강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민중의 무기다.
이 점에서 시민의회는 최소한 3중으로 혁신적이다. 우선 국민대표 방식에서, 추첨과 윤번으로 평범한 동료 시민을 일시적 대의권력으로 세운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민주적 대표 방식이다. 다음으로 추첨에 응한 미니시민에게 높은 수준의 집단지성과 공적 책임에 참여할 체계적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시민참여 방식이다. 끝으로 집단학습과 숙의를 거쳐 사회적 합의 성격의 권고안을 작성해 정부와 의회에 깨어 있는 국민의사를 전하고 수용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국민압력 수단이다.
다른 제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구성되고 운영되는 시민의회는 여론조사와 선출의회, 국민투표, 헌법재판, 집회시위, 전문가 모임 등 기존의 의사 표출 방식과 견주어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여론조사와는 앞서 보았듯 숙의의 유무에서 갈린다. 시민의회의 권고안은 여론조사에 숙의성과 집단지성, 사회적 합의의 성격이 더해지고 단순 찬반을 넘어선 종합 진단과 처방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새로운 사안이나 지배적 통념이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여론조사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시민의회는 집단학습과 숙의를 거치며 새로운 주제를 소화하고 지배적 통념을 성찰할 역량을 갖춘다.
선출의회와는 구성원의 성격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선거의회에는 선거에서 뽑힌 엘리트가 모이지만 시민의회에는 추첨으로 뽑힌 일반시민이 모인다. 시민의회 구성원은 진영논리와 당리당략, 재선 욕구에서 자유롭다. 잘 보여야 할 당 지도부도, 지켜야 할 선거 공약이나 당론도, 전문가처럼 지켜야 할 명성도, 이해관계자처럼 얽힌 사익도 없다. 그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 잠깐 시민의원의 옷을 입고 중대 사안 해결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이다.
게다가 시민의회에는 선출의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청년과 여성, 임금노동자, 자영업자, 노인이 인구 비례만큼 제 몫을 차지한다. 그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모두 공적 사안의 진단과 처방에 투입되니, 시민의회는 전문가 집단의 이론 편향과 집단사고에서 자유로운 풍부한 인지다양성을 제공받는다.
전문가 모임이나 활동가 모임과도 다르다. 전문가와 이해관계자는 시민의회에서 발표와 질의응답의 주체가 될 뿐, 권고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일반시민이다. 시민의회는 삶의 현장에 뿌리를 둔 평범한 시민으로 구성되기에, 활동가 모임보다 덜 이념적이고 대의명분에 덜 집착하며 덜 전투적이다.
헌법재판과도 갈린다. 헌재는 숙의성과 집단지성에서 뛰어나지만 선출되지 않은 법조 엘리트 기구라는 점에서 민주적 정당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구체적 사건성이 있어야 움직이며 사후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반면 시민의회는 국민의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그 결정의 원초적인 민주적 정당성을 누구도 시비하기 어렵고, 사건성을 요구받지 않으며 권리 판단이 아니라 정책 형성을 다룬다.
공론조사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시민의회와 가장 자주 혼동되는 것이 공론조사다. 둘은 숙의와 추첨이라는 두 기둥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깊은 공통점을 갖지만, 목표와 산출물에서 결정적으로 갈린다.
제임스 피쉬킨이 창안한 공론조사의 핵심 목표는 만약 모든 시민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숙의한다면 여론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데 있다. 그래서 공론조사는 숙의 전과 후에 같은 참여단을 상대로 두 번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의견 변화의 추이를 가장 중요한 결과물로 내놓는다. 공론조사는 그 자체가 매우 정교하고 깊이 있는 여론조사이며, 그 결과는 깨어 있는 시민의 진짜 여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참고자료가 된다. 그래서 공론조사의 참여단은 사전 여론조사를 전제로, 숙의 전 의견 분포가 초기 여론조사와 통계적으로 유사한지를 따지는 정교한 표본 설계에 가깝다.
반면 시민의회는 여론 측정을 넘어 특정 쟁점에 대한 사회적 결정, 곧 구체적 권고안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참여 시민은 주어진 선택지에 선호를 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시민입법자처럼 해결책을 직접 토론하고 설계하여 상세한 보고서로 제출한다. 그래서 시민의회는 사전 여론조사를 거치지 않고, 사회의 얼굴 그 자체를 닮은 집단을 만드는 데 집중하며, 공론조사보다 훨씬 긴 시간을 들인다.
요컨대 공론조사가 깨어 있는 시민의 생각을 담은 스냅사진을 찍는 것이라면, 시민의회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담은 상세한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다만 현실에서는 둘을 칼로 무 자르듯 가르기 어렵고 가를 실익도 크지 않다. 어느 방식이든 학습과 토론, 숙의가 요구되는 쟁점과 대안에서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3 합의로 권고안을 내놓는 부담 때문에 시민의회보다 정책 권고 없이 숙의 여론만 보여주는 공론조사가 선호되어 왔다.
국민투표와는 배척하지 않고 보완한다
직접민주주의의 상징인 국민투표와도 시민의회는 작용 방식과 효과가 다르다. 둘 다 중대 사안에서 국민의사를 확인하는 수단이지만, 국민투표는 모든 국민의 1인 1표로 드러난 전체 국민의 뜻을 대의권력에게 보여주는 반면, 시민의회는 미니국민의 숙의로 드러난 뜻을 대의권력이 알아보는 도구다. 한마디로 국민투표는 국민이 대의권력에게 알려주려고 조직하고, 시민의회는 대의권력이 깨어 있는 국민의사를 알려고 조직한다.
둘은 적합한 사안에서도 다르다. 국민투표는 찬반으로 결정하기 좋은, 가급적 하나의 질문, 곧 원 포인트 사안에 적합하다. 시민의회는 찬반에 친하지 않은 개방적 사안에 대해서도 권고안 형식으로 국민의사를 형성하고 확인할 수 있다. 시간과 비용에서도 차이가 크다. 국민발안이든 국민거부든 국민소환이든 마무리 절차인 국민투표까지 오려면 보통 1년 넘게 걸리고 안내문과 투표용지 인쇄, 발송, 개표에만 막대한 예산이 드는 반면, 시민의회는 보통 6개월에 5억 원 안팎이면 충분하고 온라인으로 하면 더 줄일 수 있다. 사회적 비용에서도 다르다. 국민투표는 찬반 투표라 의견의 분열과 대립이 불가피하고 어느 쪽으로 결정되든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반면, 시민의회는 국민 눈높이에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권고하는 수준이라 대립을 부를 여지가 적다.
그래서 국민투표와 시민의회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보완한다. 국민투표가 활발한 나라에서도 시민의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고, 시민의회를 중히 여긴다고 국민투표를 멀리할 이유가 없다. 국민발안과 국민거부, 국민소환의 직접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스위스, 그리고 그 제도를 본떠 20세기 초 진보주의 시대에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한 미국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에서는, 시민이 직접 입법을 발의하고 국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어 굳이 시민의회를 정부에 촉구할 유인이 약하다. 그럼에도 이들 지역에서도 지방자치 차원에서는 시민배심과 시민의회가 효능감이 높아 활용 빈도가 높다. 흥미로운 것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넘는 과정에서 직접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가 함께 활성화될 뿐 아니라 서로 결합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융합의 구체적 사례들은 뒤의 사례 장에서 따로 살핀다.
시민의회는 어떤 사안에 어울리는가
시민의회의 업무는 원칙적으로 선출의회의 업무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엄연히 선출의회가 있으므로, 시민의회는 선출의회가 실패하는 예외적 경우에 한해 단발성으로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상적 입법과 정책은 상설 선출의회가 지금처럼 처리하되, 사안의 속성상 시민의회가 더 적절한 일부 사안만 그 관할로 정하자는 것이다. 시민의회법이 제정되기 전이라도 그런 사안에 대해서는 선출의회가 주저하지 말고 시민의회에 의뢰해 권고를 받아 처리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이자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자세다.
속성상 시민의회에 맡기기에 좋은 사안은 다섯 가지다. 첫째, 헌법과 정치관계법의 주요 사항처럼 선출의회와 선출의원, 원내정당이 당사자로서 이해관계를 갖기에 집단 제척이나 집단 회피 사유에 해당하는 정치개혁 사안이다. 둘째, 안락사 허용 여부처럼 국민이 건전한 상식과 도덕 감정으로 직접 결정하는 편이 나은 민감한 가치 딜레마 사안이다. 셋째, 10대 재벌의 편법 상속처럼 선출의회에서 부패와 침묵의 카르텔이 유지되는 중대 정책 사안이다. 넷째, 김건희 특검법이나 노란봉투법처럼 여야의 의견 차이가 너무 커서 교착에 빠진 중대 정책 사안이다. 다섯째,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전환, 미중 패권 경쟁과 북핵 시대의 외교안보 정책처럼 선출의회의 임기보다 훨씬 긴 호흡의 초당파적 대응이 필요한 사안이다.
그 밖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의 재의결권이나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는 기관장 임명동의권을 시민의회에 부여하자는 제안, 나아가 선출되지 않은 엘리트 숙의기관인 헌법재판소를 시민 숙의기관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검토할 만하다.
반대로 시민의회에 맡기기에 적절하지 않은 사안도 있다. 대표성과 숙의성을 확보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리므로 긴급한 결정을 요하는 사안은 부적절하다. 선택지가 이미 극도로 제한된 사안이나 속성상 찬반으로 결정해야 하는 사안도 시민의회의 숙의성과 창조성을 원천적으로 제약하기에 가성비가 떨어진다. 요컨대 국민의사를 확인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시민의회만 고집할 일은 아니다. 사안의 성격과 조건에 비추어 그때그때 가장 적절한 방식을 골라 쓰면 된다.
차선의 정치,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
시민의회를 만병통치약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시민의회는 선출의회를 대체하거나 그보다 큰 역할을 할 수 없다. 모범적으로 운영된 시민의회의 권고안이라도 그것은 최상의 정치가 아니라 차선의 정치다. 시민의회에는 선출의회와 달리 대통령 직을 겨루는 걸출한 정치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오는 불가피한 한계다. 시민의회의 권고안은 이념정치나 운동정치가 기대하듯 진보적이거나 이상적이지 않고, 대체로 실용적이되 제한적으로 실험적일 가능성이 높다. 집중 학습을 통해 기존 통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기에 완고하거나 수구적이지는 않겠지만, 실용적 진보와 실용적 보수의 합리적 핵심을 결합하는 선에서 시민사회의 건강하고 온건한 가치관을 반영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민의회의 가치는 분명하다. 국민을 닮은 미니국민이 집단지성과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내는 해법은, 전체 국민이 똑같이 공부하고 토론할 때 도달할 가상의 해법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시민의회의 권고안을 집단지성으로 깨어난 국민의사의 최대근사치라 규정하며, 특단의 사유가 없는 한 누구든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어록을 빌리자면, 시민의회의 권고안은 서생의 문제의식이 상인의 현실감각과 결합한 결과다. 포퓰리즘이나 집단편견에 휘둘리기 쉬운 여론조사 민주주의에 견주면, 학습과 토론으로 형성된 보통사람의 집단지성을 드러내는 시민의회야말로 민주주의의 본령에 한결 가깝다.
지금은 정부의 무기, 시민의 권리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현실이 있다. 시민의회는 대표성과 숙의성, 투명성을 보장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든다. 여론조사는 1천 명을 표본으로 삼지만, 시민의회를 그 규모로 꾸리면 비용이 엄청나고 무임승차 유인도 커진다. 그래서 시민의회는 보통 100명에서 200명 안팎으로 구성한다. 참고로 추첨시민 500인으로 진행된 국회 발주 국민연금 공론조사는 나흘, 30시간의 학습숙의 과정에 26억 원가량을 썼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지만, 정책 오류가 부르는 사회적 비용을 생각하면 시민의회로 국민의사를 파악하는 비용은 오히려 가성비가 높다.
문제는 이 비용 때문에 시민의회가 지금까지 정부의 무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나 국회, 지자체장은 결정 장애에 빠진 사안에 대해 시민의회를 꾸려 그 결정을 최대한 수용하겠다고 선언하면 비난 대신 박수를 받는다. 그래서 대의권력은 앞으로도 자기에게 유리할 때 선별적으로 시민의회를 동원할 것이다. 반면 주권자 시민들은 선출의회의 실패와 직무유기가 명백한 경우에도 비용 탓에 시민의회를 꾸리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뿐이다. 본래 민중의 무기로 태어난 추첨시민의회가 대의권력의 편의와 책임 전가 수단으로 쓰이는 셈이다.
이 전도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시민의회를 시민의 권리로 법제화해야 한다. 시민의회법은 일정 수 이상의 유권자가 서명으로 요구할 때, 해당 사안의 관할권을 가진 국가기관이 일정 기간 안에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100인에서 300인 시민의회를 소집해 운영할 의무를 지우는 것이어야 한다. 법제화의 핵심은 시민이 필요할 때 시민의회를 소집할 권리를 창출하는 데 있다. 그래야 시민의회가 관할당국이 필요할 때가 아니라 시민이 필요할 때 열리고, 비로소 일반시민이 기대고 활용하는 민주주의의 신병기가 된다.
다만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시민의회 결정에 구속력을 부여하지 못할 선험적 이유는 없다. 선출의회의 결정에는 과반수는 물론 재적 과반수 출석에 출석 과반수 찬성이라는 사실상 4분의 1 다수결에도 구속력을 부여하는데, 3분의 2가 넘는 사회적 합의에 구속력을 주지 못할 규범적 이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현행 헌법상 국회가 입법권을 독점하기에, 시민의회에 입법권이나 예산권, 국정조사권 같은 권한을 조금이라도 주려면 개헌이 필요하다.
개헌 전이라도 법률로써, 법정 요건에 맞는 중대 사안에 대해 시민이 서명으로 소집을 요구하면 관할당국이 시민의회 운영을 지원하고 그 권고안을 최대한 존중할 의무를 부과할 수는 있다. 시민의회의 헌법기관화는 아직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했고, 법정기관화조차 벨기에 동부 독일어권 오이펜에서 간신히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우리 국회가 개헌에 나설 때 국민투표와 시민의회를 헌법 사항으로 올린다면,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선도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촛불시민을 동력으로, 3종 혼합민주주의를 향하여
분명한 사실은, 이미 많은 나라에서 대의권력의 결정이 국민발안과 국민거부 같은 직접민주주의, 참여예산제 같은 참여민주주의, 시민의회와 시민배심 같은 추첨숙의민주주의의 결정으로 보완되어 왔다는 점이다. 요컨대 20세기가 대의민주주의 하나로 그린 단색 민주주의의 시대였다면, 21세기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삼되 직접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 추첨숙의민주주의의 3중 세례를 받으며 진화해 온 혼합민주주의다. 이제 민주주의 선진국이란 대의민주주의의 단점과 한계를, 국민투표와 시민의회와 주민자치 같은 다양한 장치의 제도화로 적절히 보완하는 혼합민주주의 선진국을 뜻한다.
시민의회는 집단학습과 숙의로 형성된 국민의사를, 선거나 국민투표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확인하는 혁신적 방편이다. 앞으로 주권자 시민들은 선출의회가 직무유기와 부패유착, 이해충돌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시민의회를 소집해 그 실패를 교정할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시민의회가 대의권력의 필요가 아니라 시민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는 나라, 그것이 시민의회 선진국이다. 21세기 혼합민주주의는 주권자의 손에 주기적 선거 외에도 국민투표와 시민의회라는 오래된 미래의 무기를 쥐어 줌으로써 민주정치의 온도와 속도를 높이고 구조개혁의 힘을 확보할 것이다. 그 길로 우리나라가 성큼 나아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