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첨된 사람들의 지혜 — 시민의회,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 | 곽노현
징검다리 시민정치학교
7강. 시민의회와 공론조사: 추첨숙의 민주주의의 장단점과 도입전략
나는 어떤 제도든 만병통치약처럼 얘기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우리나라 시민사회는 이런 경향이 다소 강한 편이다. 비판적으로 볼 것은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시민의회도 직접 민주주의도 다 열려 있는 가능성이지만, 어느 정도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용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오늘 전하고 싶은 결론이다. 시민의회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메워주는 강력한 보완재이지,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하는 만능 열쇠는 아니다.
(인공지능 요약)
1. 여섯 번의 강의, 대의 민주정 고쳐 쓰기
지난 여섯 번의 강의는 선거로, 혹은 시험 성적으로 뽑히는 대통령과 국회와 사법부, 이 대의 권력들이 어디에서 문제를 일으키는지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대의 권력자들이 주권자의 뜻을 잘 헤아려서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전제, 그리고 그렇지 못하면 선거로 심판하고 교체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대의민주주의는 서 있다. 그런데 우리 선거 제도를 들여다보니 승자 독식 구조였다. 35%에서 50%대 득표로 당선되고 나머지 표는 전부 사표가 된다. 대표되지 않는 표가 너무 많았다.
비례대표제로 바꾸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비례대표제를 하면 다당제가 되고, 지금의 적대적 공생 양당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적대적 공생 양당제는 권력의 저수지이면서도 실질적인 변화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구조였다. 대통령제는 헌법이 보장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였고, 국회는 남성 80%, 법조인과 고시 출신이 100명이 넘고, 평균 연령 55세에 20~30대는 거의 대표되지 않는 엘리트 클럽이었다. 이 여섯 강의를 한마디로 하면 대의민주주의 기관들을 어떻게 고쳐야 선거 대의정이 그나마 효과적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즉 대의 민주정 고쳐 쓰기였다.
2. 고쳐 써도 한계가 있다 — 그다음은 무엇인가
선거 제도를 고치고 정당 구조를 고치고 대통령제를 고치고 국회의 셀프 입법 구조를 고치고 관료 사법을 고쳐도, 선거에 의한 대의민주정만으로는 무조건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무엇으로 돌파할 것인가. 오늘부터의 얘기가 그 답이다. 첫 번째 돌파구는 시민의회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을 떠올려보라. 그때 민주주의는 추첨을 의미했다. 웬만한 공직은 다 추첨으로 뽑았다. 선거는 오히려 소수의 방식이었다. 5001명의 민회가 있었고 이것이 의회이자 재판소 역할을 했다. 소크라테스도 그런 곳에서 재판받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원래 민주주의는 추첨정이었다. 선거정은 엘리트정이다. 잘난 사람을 뽑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은 보통 사람의 지배다. 보통 사람의 지배를 하려면 추첨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테네인들의 생각이었다.
추첨으로 뽑히는 사람은 특별히 잘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규범의식, 상식, 원칙, 기본적인 필요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의 기준이 되는 사회, 그것이 진짜 민주 사회다. 우리가 이미 익숙한 배심 재판도 사실 이 추첨 민주주의의 작은 사례다. 7명에서 15명 정도를 시민 명부에서 추첨으로 뽑는다. 이 숫자로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해관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판단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3. 2004년, 2천 년 만에 되살아난 시민의회
추첨에 의한 시민의회는 고대 아테네에서 몇백 년간 쓰이고 나서 어디에서도 재현되지 않았다. 그런데 2004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선거제 개혁을 주제로 부활한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22년 전이다. 이후 아일랜드가 2007년 무렵부터 낙태와 동성혼 문제를 시민의회에 회부했고, 그 권고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통과됐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시민의회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160명의 일반 시민을 200시간에 걸쳐 학습시키고 토론시키고 숙의시켰다. 전문가들의 예측을 다 뒤집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것이 내가 시민의회라는 아이디어에 확신을 갖게 된 계기였다. 추첨된 시민들이 입법 권고를 하는 방식, 이것이 선거 민주주의를 보완할 진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4. 시민의회가 다뤄야 할 첫 번째 영역 — 셀프 입법 사안
시민의회가 가장 적합한 첫 번째 영역은 이해충돌 사안, 즉 셀프 입법 사안이다. 국회의원의 권리 의무를 국회법과 정치자금법으로, 국회의 권리 의무를 헌법으로 정하는 것 모두가 국회의원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 이해 당사자인 사안이다. 누구도 자기 사건을 재판할 수 없고, 자기 사건에서 자기를 대리할 수 없다는 법 원칙이 있다. 이해충돌 당사자는 의사결정에서 제척되고, 상대방은 기피할 수 있고, 당사자 스스로 회피할 수 있다. 국회의원이 정치관계법과 헌법을 손보는 것은 이 논리로 보면 집단 제척 사유에 해당한다.
이 셀프 입법 특권이 원천 특권으로 작동해서 수많은 파생 특권을 만들어낸다. 무기명 투표, 장관 겸임 허용 같은 것들이 다 국회의원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진 법이다. 정치관계법은 선출 의회가 입법하기에 부적합하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인구 대표성을 갖춘 100명에서 500명 정도의 시민을 뽑아서, 그들의 상식과 원칙에 비추어 선거제도, 국회의원 세비, 보좌관 배정, 특권, 정치 후원금, 징계 절차 등을 정하게 하는 것이 훨씬 낫다.
5. 두 번째 영역 — 가치가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
아일랜드가 낙태와 동성혼을 시민의회에 맡긴 이유가 있다. 가톨릭 국가에서 정치인들은 이런 사안에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 잘못 말하면 낙선한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앞뒤 속이 다른 이중적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선거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안은 이해충돌이 아니라 가치 판단의 문제다. 낙태나 동성혼을 허용할지 말지는 과학의 영역도 전문가의 영역도 아니다. 부당한지 정당한지, 과잉인지 아닌지, 이런 판단은 전문가 우위가 통하지 않는다. 일반 시민의 상식과 원칙이 앞서야 한다. 그리고 정치권 입장에서도 이건 자신들이 책임을 떠안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계속 미룰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다.
실제로 아일랜드 시민의회는 이 문제를 훌륭하게 풀어냈다. 종교 지도자도 금융 전문가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내 사촌, 내 이웃의 이야기를 나누며 결국 허용 쪽으로 결론을 냈고, 그 결론이 국민투표에서도 승리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사안은 대부분 헌법재판소로 간다. 교사의 정치 기본권 허용 여부 같은 것도 시민의회가 다룰 만한 사안이다. 시민의회는 진보의 그릇도 보수의 그릇도 아닌 굉장히 중립적인 그릇이다.
6. 설계의 핵심 — 대립하는 전문가와 학습 자료
시민의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설계가 중요하다. 찬성과 반대 양쪽에 가장 뛰어난 대변자를 붙여야 한다. 한쪽만 하면 안 된다. 이 양쪽 전문가들이 함께 의제와 질문을 설정해야 한다. 질문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답이 유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습 자료를 만들 때도 양쪽 전문가가 어디까지는 합의된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쟁점인지를 명확히 구분해서 내놓아야 한다. 이 자료의 전문성과 중립성이 시민의회의 공신력을 결정한다.
원전 건설이나 폐기 같은 사안도 시민의회에 적합하다. 안전 문제는 불확실성의 영역이라 전문가가 더 낫다는 보장이 없다. 중장기적 효과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고도의 가치 판단이 개입하는 사안일수록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결정하게 해야 한다.
시민의회는 보통 과반수가 아니라 70% 이상의 합의를 요구한다. 7대 3이면 이미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고, 이 정도면 컨센서스가 이뤄졌다고 본다. 70% 미만이면 합의가 안 된 것으로 친다. 권고적 효력밖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 압도적인 합의 강도가 그 권고에 힘을 실어준다.
7. 세 번째와 네 번째 영역 — 긴 시간 지평과 장기 교착
시민의회가 다뤄야 할 세 번째 영역은 시간 지평이 길게 작동하는 사안이다. 선거 주기에 비해 영향력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문제는 선출 의회에서 의제화가 잘 안 된다. 내 임기 안에 끝날 일이 아니면 자꾸 미뤄진다. 연금 개혁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네 번째 영역은 여야 간에 오래 교착된 사안이다. 국회 회기는 보통 2년 단위로 돌아간다. 법안이 상정되고 1년 넘게 처리 못 하면 장기 교착이고, 2년을 넘기면 참을 수 없는 교착이다. 이런 법안을 무조건 시민의회로 넘긴다는 규칙을 만들면 어떻게 될까. 결정이 늦춰지면 늘 기득권이 이득을 본다. 현상 유지가 곧 기득권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장기 교착 법안을 시민의회로 강제 이관하는 장치가 있으면, 여야가 적대적 공생으로 방치해온 사안들도 결국 다뤄지게 된다.
8. 시민의회의 한계 —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추첨 시민의회는 직관적으로 매력적이지만 뚜렷한 한계도 있다. 선출 의회가 있는 이상 시민의회에 구속력을 주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이 뽑지 않은 사람의 결정에 구속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나는 저 사람을 뽑은 적이 없다, 위임한 적이 없다는 반발이 나온다.
표본 크기 문제도 있다. 150명 규모면 통계적으로 위아래 10% 오차 범위를 갖는다. 천 명 규모 여론조사가 플러스마이너스 3% 오차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크다. 이 규모로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연령, 지역, 성별 비율은 확실하게 맞출 수 있다. 그리고 참여자들은 최소한 이해관계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강점이 있다. 주말을 희생하고 참여해야 하니 고관여층 위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정말 부유한 사람들의 입장은 경제단체 같은 곳을 전문가 증인으로 불러 들으면 되므로 설계로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정당성의 문제다. 내가 위임한 적 없는 사람들의 결정에 왜 구속되어야 하냐는 반발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시민의회를 몇 가지 한정된 분야, 즉 셀프 입법 사안, 가치 민감 사안, 긴 시간 지평의 사안, 장기 교착 사안에 국한해서 권고적 효력만 부여하고, 70% 이상의 압도적 합의를 요구하며, 양쪽 전문가가 대등하게 참여해 학습 자료를 만드는 조건 아래서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