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대와 터널 — 3%의 지분으로 100%를 지배하는 나라 | 곽노현
시민정치학교 9강
나는 30년 넘게 이 문제를 추적하면서 삼성 징비록이라는 글을 썼다. 임진왜란 후 유성룡 대감이 징비록을 쓴 것처럼, 삼성 사건 이후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지 15개 그룹의 공범 관계를 하나하나 정리한 것이다. 재벌 개혁은 결국 정치의 문제이고 제도의 문제다. 셀프 입법 특권을 없애는 것과 똑같은 논리로, 재벌의 자기 거래 특권을 없애는 것. 그것이 진짜 공화국으로 가는 길이다.
1. 민주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 — 재벌개혁
그동안 우리는 선거 제도, 정당 제도, 대통령 제도, 셀프 입법 특권, 시민의회, 직접민주주의를 다뤘다. 오늘은 그 모든 개혁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검증하는 시간이다. 대의민주정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있다. 재벌에 대해서 제대로 힘을 쓰느냐다.
만약 정부가, 법이 돈으로 매수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공화국이 아니다. 민주 국가가 아니다. 지금의 재벌 체제를 우리의 공화국과 민주주의와 법이 제대로 통제하고 있는가. 나는 선거 대의정이 대단히 약하기 때문에 주권자의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국민 발안권으로 국민 개헌권과 국민 입법권을 줘야 한다고, 국회의 입법권과 국민의 입법권이 경쟁해야 한다고 얘기해왔다. 선거와 추첨과 직접 결정, 이 3종 혼합 민주정으로 주권자의 권리가 강화될 때 비로소 재벌 체제도 더 통제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은 과연 그런지 검증하는 시간이다.
2. 재벌의 3대 특징 — 문어발, 선단, 그리고 3%
재벌이란 무엇인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문어발 업종이다. 원래 기업 집단은 수직적이든 수평적이든 연관 업종으로 구성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재벌은 학생 교복도 만들고 놀이공원도 하고 보험회사 증권회사도 하고 카메라도 만든다. 경공업, 중공업, IT 산업, 서비스업이 다 한 동일인, 한 재벌 총수의 손아귀에 있다.
둘째는 선단 경영, 즉 황제 경영이다. 이 비연관 문어발 기업들이 하나처럼 움직인다. 대장 깃발을 휘날리는 기함 하나만 장악하면 나머지 함대는 다 꼬붕으로 따라온다. 공정거래법은 이 지배권자를 동일인이라고 부른다.
셋째, 이 동일인의 지분이 의외로 무지하게 낮다. 우리나라 5대, 10대 재벌 총수의 평균 지분율은 3%가 안 된다. SK 최태원 회장은 1%도 안 되는 지분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선단 모두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 이런 재벌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어디에도 없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chaebol이라는 단어가 등재된 지 20년이 됐다. 일본은 미군정이 진주하자마자 군벌과 함께 재벌을 해체했다. 지금 미쓰비시 같은 이름은 남아 있지만 그 안에 단일 가문 지배자는 없다. 우리나라 재벌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3. 3%의 이익과 97%의 이익은 다르다
재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3%도 안 되는 지분으로 100%를 움직이니, 3%의 이익과 나머지 97%의 이익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3%의 이익은 어떻게든 100%의 지배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고 대물림하는 것이다. 이 지배권을 이용해 97%에게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어떻게 3%로 100%를 지배할 수 있는가. 비밀은 계열사 간 투자에 있다. 창업자가 첫 번째 회사를 잘 키워서 이익을 법인에 쌓아둔다. 그 돈으로 두 번째 회사를 창업하되 지분은 50%만 갖는다. 그래도 지배권은 충분하다. 나머지 주주들은 흩어져 있어 뭉치는 데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대여섯 개 핵심 회사에 30%씩 지분을 갖고, 이 대여섯 개 회사가 각자 수평적, 수직적 연관 기업을 지배하게 만든다. 그룹 전체가 커질수록 총수의 실제 지분율은 오히려 작아진다.
이 구조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기도 하다. 재벌 총수 입장에서 배당은 97%가 남의 돈이 되는 것이니, 배당하지 않고 법인 금고에 쌓아둔다. 그 돈은 명목상 주주들의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총수의 것이다. 언제든 새 계열사를 만들 투자금으로 쓸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배당을 극도로 안 해왔다. 배당을 안 하니 주가가 오르지 않았다. 이재명 정부가 상법을 몇 차례 개정하면서 주주 환원을 의무화했고, 반도체 슈퍼 호황과 맞물려 최근 주가가 급등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4. 이재명 정부의 세 차례 상법 개정 — 재벌 개혁이라 말하지 않은 재벌 개혁
이재명 정부는 재벌 개혁이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 세 차례 상법을 개정했다. 상법은 총칙, 상행위, 회사법, 보험법, 해상법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회사법이다. 주식회사라는 법인격을 가진 기업의 헌법과 같은 것이다. 역대 어느 정권도 못 한 재벌 개혁을 상법 개정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밀어붙인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 멀다. 왜냐하면 재벌 대기업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첫 번째로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재벌 총수 입장에서는 자기가 지배권을 갖고 있는 거대한 하나의 기업 안에서, 그 지배권을 뺏기지 않고, 확장하고, 대물림하는 것이 당연한 목표다. 누구라도 그 구조 안에 들어가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비난받을 요소는 오히려 재벌이 아니라 정부다. 정부가 법을 제대로 만들면 재벌이 편법과 불법을 못 한다. 지금의 재벌 체제는 사실상 약탈 체계, 준강도 체제다. 그런데 이것은 재벌이 비도덕적이어서가 아니다. 법을 만들지 않아서다. 재벌에 포획된 정치권이 법을 안 만드는 것이다.
5. 비상장 계열사라는 지렛대 — 이재용의 44억이 500억이 된 이야기
상장 회사는 거래소와 금융감독원, 증권시장이라는 시장적 통제를 받는다. 그런데 비상장 계열사는 이런 통제가 하나도 없다. 오너와 그 일가, 특수관계인 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어떻게 악용되는가. 총수가 자식 이름으로 비상장 계열사 하나를 만든다. 몇천만 원, 요즘이면 몇억 원이면 된다. 그런 다음 잘나가는 상장 계열사가 이 비상장 회사에 일감을 몰아준다. 100원짜리를 120원에 사주는 식이다. 경쟁 없이 벌어지니 아무도 감시할 수 없다. 이것이 일감 몰아주기다. 그다음은 계열사 주식을 헐값에 넘기는 것이다. 값이 없는 비상장 계열사 주식을 시가의 10분의 1, 심하면 100분의 1 가격에 넘긴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빨대를 꽂았다’고 한다.
이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삼성 사례로 보자. 1995년 이재용은 60억 원을 증여받아 16억 원의 증여세를 냈다. 남은 44억 원으로 삼성 계열 3개 회사의 비상장 주식을 헐값에 산다. 3, 4개월도 안 돼서 이 세 회사가 모두 상장되면서 주식 가치가 20~30배 뛰었다. 44억 원이 순식간에 500억 원이 됐다. 이 중 96억 원으로 에버랜드 지분 65%를 산다. 당시 조 단위 가치를 가진 회사였다. 신주 인수 과정에서 기존 주주였던 이건희 계열사 CEO들이 자기 몫의 신주 인수권을 일제히 포기했고, 그 포기분을 이재용이 헐값에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 일이 벌어진 지 5개월 만에 심포지엄을 열고 법학 교수 42명과 함께 이건희 회장과 에버랜드 계열사 임원들을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1심과 2심에서 이겼지만 대법원에서 6대 5, 단 한 표 차이로 무죄가 됐다. 흥미로운 것은 똑같은 구조의 사건인 삼성SDS 건은 대법원에서 10대 1로 유죄가 났다는 점이다. 에버랜드 사건을 유죄로 하면 삼성 승계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무죄가 났을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나는 두 사건을 합쳐서 15대 7로 내가 이겼다고 정신 승리를 했다.
6. 에버랜드에서 삼성전자까지 — 순환출자의 마법
에버랜드를 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버랜드가 가진 자회사들, 부동산 개발회사, 신라호텔까지 다 먹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대주주가 된다. 1998년 IMF 위기 당시 삼성자동차가 망하면서 이건희 회장은 사재 출연을 약속했다. 삼성생명 400만 주를 주당 70만 원으로 쳐서 2조 8천억 원을 출연한 것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그 1년 전, 삼성생명 임직원들이 차명으로 보유하던 344만 주를 에버랜드가 주당 9천 원에 사들였다. 상속세를 피하려고 임직원 명의로 분산해뒀던 주식을 사실상 명의 개설료 수준의 헐값에 회수한 것이다. 이렇게 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25% 대주주가 됐다.
삼성생명은 다시 삼성전자의 최대 주주다. 보험 가입자들의 돈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사서 계속 보유하는 구조다. 원래 금산분리 원칙상 금융회사는 산업회사를 지배하면 안 된다. 그런데 삼성만은 예외적으로 이 규제를 피해간다. 박용진 전 의원이 초선 시절부터 4년 내내 이 문제를 제기했다. 다른 회사는 계열사 지분을 시가로 계산해서 순자산 대비 한도를 적용받는데, 삼성만 취득가로 계산한다. 옛날 몇백 원 시절 가격으로 계산하니 규제 자체가 무력화된다. 이 특혜가 20년 가까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이재용의 밑에는 에버랜드, 생명, 전자, 전기가 순환출자 고리로 서로를 지탱하는 구조가 완성됐다. 이재용은 이 고리 중 하나만 확실히 쥐고 있으면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우연이 아니라 설계다.
7. 국민연금이라는 열쇠 —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교훈
재벌을 통제하는 네 가지 수단이 있다. 조직 내부 통제, 이사회 통제, 주주총회 통제, 시장 통제다. 그런데 사외이사도 재벌 총수가 뽑고, 이사회도 총수 편이고, 주주총회도 계열사 지분과 총수 가족 지분을 합치면 대부분 과반을 넘는다. 유일하게 다른 힘을 가진 존재가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삼성 대기업들의 1대 또는 2대 주주다. 만약 국민연금이 적극적 주주 역할, 즉 수상한 거래에 대해 CEO를 불러 설명을 요구하고 이사회 안건에 반대표를 던진다면 상당한 견제가 가능하다. 그런데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불공정 합병 당시, 국민연금은 이재용의 손을 들어줬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뇌물을 받고 국민연금 투자본부장에게 찬성을 압박한 결과였다. 만약 국민연금이 반대했다면 이 합병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8. 오중 방어벽 — 재벌 개혁의 구체적 설계
재벌 개혁은 어렵지 않다. 원리는 셀프 입법 특권과 똑같다. 국회의원이 자기 이해가 걸린 정치관계법을 셀프로 입법하는 것을 문제 삼았듯이, 재벌 총수가 계열사 간 거래를 통해 자기 대리, 쌍방 대리를 하는 것을 냄새나는 거래로 규정해야 한다. 총수와 계열사 사이, 계열사 간의 특수관계인 거래는 일단 불공정 거래로 추정하고, 공정했다는 것을 그쪽에서 입증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입증 책임 전환이라 한다.
여기에 더해 주주총회에서는 이해관계자, 즉 총수와 계열사의 투표권을 제한하고, 이사회에서는 이런 거래에 3분의 2 이상의 가중 다수결을 요구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오중 방어벽이라고 부른다. 자기 거래 특권을 이용한 사익 편취, 즉 빨대 특권과, 계열사 사이에 유리한 쪽으로 흐르게 만드는 터널 특권. 이 둘을 막는 것이 개혁의 핵심이다.
문어발 확장을 막으려면 금산분리를 예외 없이 확실하게 하고, 순환출자를 막고, 피라미드 지배구조를 손회사까지만 인정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10여 년 전 재벌 개혁에 성공하면서 증손회사부터 지배력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미국에 재벌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중 방어 입증 책임 전환, 철저한 금산분리, 그리고 세제상 부분 자회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은 80% 이상 지분을 가진 자회사는 하나의 재무제표로 보고 세금을 한 번만 부과한다. 그러니 굳이 부분 지분으로 여러 자회사를 문어발식으로 늘릴 유인이 없다. 우리나라는 30% 지분만으로도 자회사를 지배할 수 있게 방치돼 있어 문어발 확장이 쉽게 일어난다.
9. 완벽한 실패, 그러나 성장은 했다
우리나라 재벌은 무엇의 산물인가. 입법의 실패, 행정의 실패, 사법의 실패, 즉 법치주의의 완벽한 실패, 공화국의 실패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오너 체계를 통해 우리는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 오너 체계가 무조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 성장하고 확대되면 공화가 돼야 한다. 상장을 해서 자본시장의 규율을 받고, 주주들의 규율을 받고, 이사회의 규율을 받아야 한다. 소수 주주들도 제소권을 넓게 인정받아 손해배상 소송을 편하게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최후의 보루는 형사 책임이다. 100원짜리를 10원에 팔면 배임인데, 이것이 배임이 아니라고 풀어준 것이 삼성 에버랜드 사건이었다.